2007/01/30-01:46:47
예전에 아마 고등학교 때였나, 수련회 같은 거였는데 여러 학교가 모여서 같이 며칠간 생활하는 그런 행사가 있었다. 지금 기억에 참석 인원이 많지 않았던 걸로 기억나는 걸로 봐서 각 학교마다 따로 선발된 임원들만 참가하는 수련회였던 것 같다.
수련회는 늘 그렇듯이 대충 유격 훈련 비슷한 체력훈련같은 걸 했을 테지만, 왠일인지 그 수련회에서 기억나는 것은 조별 토의발표이다. 한 15명 정도로 조를 짜서 두시간 정도를 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든지 발표를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tutor로는 현직 장학사들이 한 분씩 배치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꽤나 거창했던 수련회였나보다. 그런데 문제는 무언가를 토의하라고 모아놓고 게다가 두시간 후에 토의한 걸 발표하래는데, 도무지 뭘 해야 좋을지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프로그램을 누가 생각해 냈는지 정말 고리타분하고 바보같은 짓이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게 발표자체가 아니라 그런 아이디어를 이끌어 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어쨌든 따로 방에 가둬두고 뭐든지 발표할 거리를 생각해서 토의를 하랜다. 이거 정말 큰일 났다 한 2~3분간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때 tutor로 계시는 장학사 분이 한 말씀 하신다. '너희들 청소년 흡연이 심각한 문제 아니냐 그걸로 발표해라'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다가도 진행이 안된다. 뭐, 청소년 흡연 심각한 문제다. 신문에서 보니까 흡연청소년 은근히 많다더라. 끝. 이거 또 난리났다. 그때 역시나 우리의 tutor 또 한말씀 하신다. '대충 생각해보면 퍼센트 나오잖아 그거 말하면 되니까 그렇게 해라'
그렇다. 결국 숫자를 지어내야 했다. '이 만큼이나 많은 청소년이 담배를 피운다(아마도) 그러니까 이 (가짜)데이터에 의하면 흡연은 실제로 심각한 문제이다.(아마도)'라는 발표를 하라는 tutor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열심히 숫자를 날조했다.
드디어 발표시간. 우리조는 '흡연 청소년의 (무려)실태(!)' 라는 제목으로 12.5%니 35%니 하는 숫자들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고 이 움직일 수 없는 수치데이터 앞에서 우리의 tutor와 panel들은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청중 즉 같은 수련회에 참석했던 친구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약간 이상했던 점은 숫자를 날조한 일당(즉 우리조원)들은 약간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저 숫자는 우리 머리속에서 지어낸 것이 분명함에도 저렇게 공공의 장소에서 낭독되는 것을 들으면서 매우 근거있는 데이터가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발표는 무사히 끝났고 우리조는 무려 칭찬 씩이나 들어서 은근한 죄책감을 가지고 수련회를 마쳤다.
여기서 아주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1. 2시간 동안 자유주제 토의후 발표가 무슨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었을까.
2. 그마저도 우리는 갑자기 토의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3. 우리의 tutor는 우리의 토의 프로그램을 망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4. 신나서 숫자놀이에 참가한 우리의 팀원들.(사실 나는 처음엔 거짓말을 한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5. 청중 앞에서 발표하고 있는 우리의 거짓말을 들으니 마치 진실인 것처럼 들렸다.
6. 그러나 저러나 그 출처를 알수 없는 수상한 데이터를 줄줄 읊어대는대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자료의 출처를 문제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7. 결국 그 프로그램은 나에게 엄청난 반면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8. 아직도 돈 들여서 이런 쓸데없는 짓들 하고있나??